여기에서의 ‘나’ : 누차 알겠지만 제 3의 소설속의 인물

 

 

 

“잘 들어가~ 안녕!!”

 

환한 웃음을 내보이며 손을 흔든 뒤 그녀가 버스를 타는 걸, 아니 타고 저기 멀리까지 - 보이지 않을 때까지 - 가는 걸 본 후 입술을 한번 굳게 다물면서 돌아선다.
감정은 바로 깊은 침묵으로 휩싸인다.
‘휴우-’ 하는 길다란 한숨을 내뱉은 후 집으로 향하는, 커다랗게 진열되어 있는 좌석버스에 올랐다.
집에 도착하려면 족히 2시간은 걸리겠다.
차가 막힐 것도 예상해야 했다.
오후 내내 흐렸던 날씨 때문인지 어둠이 금방 짙게 내려앉았다.
머리를 의자위로 기대어 지긋이 눌렀다.

 

오늘 그녀와 보냈던 일들을 회상했다. 아니 정리했다 라는 말이 옳겠다.
그 때 내가 무리하게 말을 몰아 붙였군. 그게 맞다고 맞장구를 쳤으면 됐을 일을.
나는 하나, 하나 행동들을 꺼내어 심판대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떡볶이를 시키고 나서 아무 말을 하지 않아서 좀 썰렁한 분위기가 되었었지.
그 때 저번에 외웠던 그 얘기를 해줬음 됐을 걸.
그런 분위기는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야.
하긴, 그래도 커피 마시면서 몇 번이고 웃고 그랬으니 그거는 만회한 셈이지.
한심하게도 난 행동 하나 하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아직 난 그녀를 세 번째로 만난 거였으니 만남에 대해 세세히 행동 하나 하나까지 생각할 만도 하였다.
후훗. 역시 그녀는 웃는 모습이 가장 예쁘지. 누가 봐도 말야.
근데 오늘은 별로 웃지 않았어. 분명 재미있는 얘기였는데도 반응이 별로였어.

 

<부정적 접근 발전>
그래. 하긴 얘긴 재미있는 얘기였는데 내가 별로 재밌게 하지 않아서지.
아니, 그것보다 그냥 얘기를 듣지 않았던 거 같아.
하긴 이번도 내가 만나자고 만나자고 해서 겨우 힘들게 나온건데 그냥 내키지도 않게 나온 자리에 뭐가 기분좋다고 웃고 그러겠어.
그러고 보니 결국 이번도 내 의지로 인해 나온 거였군.
정말 나한테 관심이 있긴 있는 걸까.
그냥 내가 내키는대로 하자고 하니까 그냥 따라만 한 게 아닐까.
어휴.. 그냥. 그래. 다 내가 만든거고 내가 하란대로 한거야.
내가 연락 안하면 연락하지도 않지.
말도 별로 하지도 않고 나를 만나서 좋아하는 거 같지도 않고.
하긴 내가 뭐가 대단하다고.
휴. 힘들군.
말자. 그냥 말자.
오늘의 만남을 끝으로 그냥 끝내버리자.
원래 만남은 세 번까지 해봐야 안다고 그랬는데 결국 보니까 별로 나하고 맞지도 않는 거 같았어.
속시원하네. 그냥 연락 안해야겠다.
그게 낫겠다.
잘됐어!

 

바깥의 풍경들은 맑은 수채화처럼 흐려지더니 한 방울, 한 방울 빗물들이 창문을 타고 비스듬히 흘러내린다.
그러더니 장대비처럼 우수수 빗방울들이 창문벽에다 투명한 방울세례를 쏟아낸다.

 

비가 오는군.
그녀는 지금 집에 도착했을까.
피식 그냥 웃음이 나온다.
그래. 요즘 시험기간이라서 많이 바쁘다고 하던데..
나와준 거만으로도 고맙지..
비가 많이 오는데 버스에서 내릴 때 비맞겠네. 우산도 안 가져왔다던데..

 

<긍정적 접근 발전>
그러고 보니 난 우산을 가지고 왔구나.
(비를 맞고 뛰어가고 있을 그녀가 떠올라진다)
훗. 웃긴 놈이지. 고작 그거 가지고 그런 맘을 품다니..
그냥 편하게 생각하면 될 걸 가지고 말야.
훗. 그 애는 비를 맞아봐야 돼. 그래야 담에는 우산을 챙길 거 아냐.
담에 만날 때는 꼭 우산부터 갖고 오라고 해야겠다.
쨍쨍 햇빛이 내리쬐는 날에는 예쁜 양산을 갖고 오라고 해야겠다. 내가 들어줘야지. ^ ^
다시 입가엔 미소가 지어진다.
저기 버스 입구에는 방금 내린 비를 맞고 흠뻑 젖은 채로 들어온 커플 한 쌍이 서로를 보며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폰을 아주 익숙한 손으로 움켜쥐고는 문자를 찍는다.

 

‘지금밖에비마니오
는데집에잘들어갔
어? 오늘마니즐거
웠고담에또보자.‘

 

보통우편 선택을 누른 후 멀리 사라져 가는 메일 그림이 ‘전송하였습니다’로 바뀌는 걸 보면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훗. 결국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이군. 연락하지 않겠다고 해놓고서..
기껏 다진 마음도 한순간에 바꾸고 헤 하고 웃고나 있으니 이래서 정말 무어가 될는지 정말 한심하지 않을 수 없군.
맨날 이런 식이지.
나쁜 것도 똑바로 나쁘게 볼 줄 모르고 내 식대로 판단해버리고 정확한 현실도 판단 못하고 우물안 개구리처럼 꿈속에서 만든 세상에서 평생 살런지!

 

<부정적 접근 재발전>
시간은 어느덧 흘러 버스에서 내린 나는 비가 그친 거리를 걸으면서 이번에야말로 정말 그녀가 내게 있어 무언지 확실히 확인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냥 물흐르듯 이리 저리 시간만 보내고 그러다 잊혀질 게 아니라 정말 확실하게 나에 대한 감정이 무언지에 대해서 알아낼거야.
갑자기 대화중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한 말이 생각이 난다.
‘이제는 제가 연락할게요.’
평소 같으면 그냥 예사롭게 넘어갔을 그 말이 갑자기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연락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닌가.
내가 자꾸 연락을 하니까 자기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는 말이 아닌가.
훗~ 그 얘기였군. 왜 인상을 지으며 내게 얘기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
그리고 나는 문자를 보낸 지 오랜 시간이 되어 살며시 호주머니에 있는 폰을 꺼냈다.
안테나 6개가 떠있고 건전지는 2계단까지 충전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문자가 오지 않았다. 1시간은 엄청 넘었는데 말이다.
그렇지. 그렇지. 그래. 내 말이 맞았어.
끝내자!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 멍히 하늘을 바라보다가 이내 이불을 확 덮어쓰고는 두 눈을 꾹 감다가 놓으면서 ‘차라리 잘됐다’ 하는 짧은 목소리를 입술 깨물면서 내뱉는다.

 

잠결에 ‘딩~~’ 하는 진동음이 짧게 한 번 울리는 걸 듣는다.


새벽 1시였다. 자는데 누가 문자를 보낸거야.
찌푸린 눈을 가느랗게 떠 쓰린 눈으로 폰화면을 본다.

 

‘죄송해요.^^;폰
약이떨어져서급히
충전하고봤어요.
저도무지즐거웠어
요.오늘비가마니오‘

 

연속으로 또 한 문자가 올라온다.

 

‘던데비맞지는않으
셨는지.. 전별로맞
맞지않았어요.고마
워요.^^
담에 또 봐요~‘


살며시 웃고 있는 내가 느껴진다.

 

 

PS)
처음 서로의 감정을 확실히 알지 못할 때 수많은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죠.
그러면서 가끔은 오해가 생기고 소리없이 멀어지기도 하고 혹은 다행히 가까워지기도 하고
아직 많이 정들지 않은 상대방을 집으로 보내고 나서 생각이 들 여러 반전들을 적어봤습니다.
예전에 적었던 글을 다시 옮겨 봤는데 새로운 느낌이 드네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