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nt)
창작은 참 어렵고도 위험스럽다.
특히 자기만족같은 창작은 더더욱 위험스럽다.
개똥인지 소금인지 구별이 안되기 때문이다.
□ 제목 : e-메일
안녕.
오늘은 또 어떤 하루를 보낼까?
여긴 전산실이야.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니 생각이 나서 이렇게 몆 자 적을려고 들렀어. ^ ^
저번에는 집에 잘 갔는지 걱정되더라.
밤이 좀 깊어서 걱정했었는데 집에 잘 갔다는 연락 받고 안심이 됐지.
연락해줘서 고마워.
난 그냥 씻고만 있었는데 잘 들어갔다는 연락을 해주니까 정말 고맙더라.
넌 정말 좋은 아이같아.
아직 마니 만나지는 못했지만 좋은 느낌이 들어.
그리고...
그 때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세게 내리치는 바람에 난 깜짝 놀란다.
“야. 뭐하냐! 빨리 가자. 진석이 생일날에 니가 빠지면 안되지.
애들 다 모였으니까 빨리 지금 나와라. 지금 뭐 메일 쓰냐?“
“아.. 아니.. 알았다.”
난 허둥지둥 지금까지 작성해 놓은 메일을 ‘임시저장함’에다 담아놓고 컴퓨터를 끄고 전산실을 나섰다.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게 내심 마음에 걸렸지만 다음에 와서 마무리를 짓겟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왠지 씁쓸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왁자지껄 술판이 벌여지고 술집은 온통 우리들의 고함소리로 나누는 대화로 인해 나머지 모든 건 오히려 고요한 듯 느껴졌다.
처음 맥주를 어느 정도 마시고 온 우리였기 때문에 소주가 입으로 털어 들어가자 맥주와 소주의 혼합작용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몇 몇 술이 세다고 자청하는 놈들은 여전히 시시껄렁한 얘기를 목청 높여 외치고 있었다.
“야. 저번에 걔 있자나. 내가 미팅한 그 애 말이다.”
“응. 근데 왜?”
“그 애 날 차고 콧대높은 척 하다가 내 옆의 친구를 몰래 찍어서 따로 연락한 거 아니겠냐.”
“야.. 천하의 진석이가 차일데도 있단 말이냐. 나가 죽어라. 하하.”
“근데 말이다. 내 친구도 완전 그 앨 비참할 정도로 찬 거 아니겠냐.
한번만 만나달라는데도 그냥 찼다 하더군. 이야.. 결국 잉과응보 아니겠냐. 하하.”
“그보다 니가 차인 게 쪽팔린다. 야. 벌주다. 한 잔 쭉 들이켜라!”
나도 친구들 틈에 끼여서 웃고 있다가 많이 취기가 도는지 자꾸만 고개가 스르르 숙여지는 거였다.
“야. 저 녀석. 왜 그러냐? 술된거 아니냐?”
“아. 아냐. 나 술 안됐어. 말짱하단 말이다”
난 그 말을 하고 그냥 의자위에다 머리를 박고 쓰러지듯 엎어졌다.
그리곤 난 맥주에다 소주를 마셨는지 소주에다 맥주를 마셨는지 그 생각에 빠지면서 멍히 계속 의자위에서 꼬꾸라져 있었다.
의자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채 누워서 멍히 탁자밑에 가려진 시커먼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술집에 오면 으레 연인들이 장난하듯 하는 낙서 몇 개를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멍히 보았다.
뭐라 써 놓은건지. 희미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누가 이런 곳에다 낙서를 한..
‘이혜진 ♡ 박진환’
난 그저 멍하니 눈을 떠 그 글자를 두 번, 세 번, 네 번째 읽고만 있었다.
‘이혜진 ♡ 박진환’
다섯 번째 읽었을 때 난 너무도 놀라서 커진 눈을 감지 못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의 이름 박진환. 그녀의 이름 이혜진.
그녀의 이름 이혜진. 잊혀졌던 그 이름 이혜진..
난 커다랗게 떠진 눈으로 여덟 번이고 아홉 번이고 열 번이고 계속해서 그 글자를 읽었다.
우리 만난 지 1년을 축하하며 여기 술집에 들러 바로 이 구석 자리에 앉아 그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날.
그녀가 무얼 할 게 있다며 고개를 숙여서 탁자 밑 벽에다 끄적 끄적 낙서를 하던 날.
그녀가 괜한 기분에 술을 많이 마셔서 그녈 업고 집으로 데려다줘야 했던 그 날..
난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
난 그 글자를 계속 계속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한 여름인데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느꼈다.
이혜진..
레몬소주. 머리핀. 푸우. 냉면. 이른 새벽. 코코아. 파아란 양산. 메일주고받기. 하얀 원피스...
난 그녀가 좋아했던, 그리고 그것들과의 여러 기억들이 한순간 내 가슴안으로 밀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정지해버렸다.
이미 11시를 넘겼지만 주위 소리는 아무 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난 그 한 글자로 인해 온갖 모든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는 걸 온몸으로 감수해야 했다.
착한 사람이었지.
그래. 착했어..
내가 그녀를 차버린 순간에도 엄청 날 걱정했었어.
마지막 날이 나의 기억위로 오버랩 되자 내 머릿속은 온통 폭풍우에 휩싸이는 커다란 바다가 되어버렸다.
아직.. 아직.
아마도.. 아직..
난 미칠 정도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도 모르게 이미 눌려져 있는, 내 손가락이 벌써 알아버린 그녀의 번호가 눌려진 폰화면을 보면서,
그러나 난 차마 ‘통화’ 그 한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굳게도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통화를 누르고 바로 종료를 눌렀다는 게 옳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날 어쩌면...
그 때 왜 내가..
난 거의 포기한 듯 아랫입술을 짙게 깨물고는 의자위에 머리를 툭 내려놓았다.
눈을 감으면 어둠속에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눈을 뜨면 그 글자가 아련거려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자포한 듯 의자위에 기대있는 날 한 친구가 끌어냈다.
“야. 집에 가자. 다들 뻗어서 이게 뭐하는 거냐..”
“어. 어.. 그래..”
난 탁자를 잡으며 일어서서는 멍하니 지갑을 꺼내서 돈을 내고는 친구들과 헤어져서는 어둠속에 파묻히며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하나도 잊지 않았다.
그토록 잊었다고 생각했건만 그 기억들을 단지 잊었다고 생각했을 뿐 아무것도 잊혀진 게 없었다.
마치 어제 그녀를 만나서 헤어진 것처럼 생생하게 모든 게 떠올랐다.
이젠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하고 지낸 시간들이 이렇게 아무렇게나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렇게도 잊었다, 잊었다 했었지만 난 결국 하나도 잊지 못하고 이렇게 마음속에 갖고 있었던 거였다.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거였다.
너의 눈빛, 너의 향기, 너의 느낌 그 모든 걸..
난 집에 도착해서는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서 메일을 확인하고 새편지가 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 컴퓨터를 끄려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편지쓰기’를 눌러 한 글자, 한 글자 서투르게 적어나갔다.
음...
그게.. 말이지..
음.. 잘 있는지..
참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너와 헤..어지고 나서 음.. 참 많은 시간이 흘렀어.
흘렀어.
..잘 있는지.. 나.. 난 잘 있어.
여전히 난 똑같지. 거의 다를 게 없잖아.
훗훗. 그 친구는 여전히 나와 함께 있어.
같이 만나서 너도 마니 친했었잖아.
그 때 생각하면 정말 웃기는데 말야. 훗.
후. 또 이렇게 예전 버릇처럼 말을 하게 됐구나.
이젠 정말이지 고치겠다고 했는데 여전히 똑같구나. 후.
그래. 그렇지 뭐. 내 버릇이 어디 갈 리가 없지.
말하면서 뜸들이지 말라고 했었지.
너와 만나면서 정말이지 고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 지키기도 전에 이렇게 멋쩍은 사이가 됐구나.
후~~ 그래. 난 잘 있고..
그냥 잘 있는지 해서..
음..
그리고 ...
어제..
친구 생일이라고 해서 학교앞 술집에 갔었어.
거기서 무얼 보게 되었는데..
그게..
난 더 이상 글을 잇지 못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널 차버리고 나서 무슨 염치로 이렇게 너에게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인가.
그 때 너에게 그러고 나서 어떻게..
난 멍히 지금까지 적어 논 글을 ‘임시저장함’에 저장해 놓고는 가만히 앉아 있다가 마우스를 옮겨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임시저장함’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는 수없이도 다짐한 보내지 못한 ‘임시메일’이 수십통도 넘은 채로 쌓여 있었다.
‘받는 이’는, 한결같이 똑같은 그 사람 이름.. 이혜진...
그리고 이어서 새편지가 지금 도착했다는 연락..
방금 ‘보낸 이’는 요즘 들어 새로 만나고 있는 그 애 이름..
.
.
.
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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